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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에 진심인 민족! 우리 선조들의 신기한 목욕 이야기

2023-08-31

목욕은 행위를 넘어 그 당시의 정치, 경제, 가치관, 제도 등이 고스란히 녹여진 중요한 문화에요.


현대에서 목욕은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푹 담그며 피로를 푸는 정서적 역할'과 '간단한 놀이를 할 수 있는 유희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1000년 전 선조들에게 목욕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목욕에 진심인 케피가 놀랍고도 신비한 선조들의 목욕문화를 생생히 알려드릴 테니 이야기 속으로 퐁당 빠져보세요!




종교적 색채가 강한 목욕, 삼국시대


목욕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기록이 남은 시기는 신라와 삼국시대 때에요. 이 나라들은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던 불교국인만큼 물을 신성시했어요. 불교에서 목욕을 단순히 몸을 청결히 하기 위해 씻는 행위가 아닌, 제사와 같은 신성한 의식을 행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갈히 가다듬는다는 뜻으로, 주술적 ․ 종교적 의미가 가미됐어요. 즉, '몸을 씻는다 = 마음을 씻는다'는 거죠.


문화재청에서 밝힌 물에 얽힌 탄생설화를 살펴보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담장이덩굴로 덮인 우물가에서 탄생하여 동천에서 목욕한 후 광채를 발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물을 신성시하는 관념에서 샘이 있는 집은 샘굿을 하였으며, 의례행사로만이 아닌 샘물에 대한 토속신앙으로 자리 잡아 평상시에도 행해졌어요.


또, 그 당시 목욕은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죄수에게 '목욕벌'이란 이름을 내릴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어요. 삼국시대에 대중화된 풍속으로 자리 잡은 목욕문화는 백제왕이 불상, 경전을 일본에 보내면서 함께 전파되었으며 불교가 발전한 통일신라시대에 증기욕이 발달되면서 더욱 확대되어 일본에 전파되기도 했어요.

신윤복 '단오풍정' [출처 : 위키백과]



남녀노소가 함께하는 치료의 목욕, 고려 


삼국시대의 목욕이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에 반해 고려시대부터는 점차 목욕이 질병치료와 예방의학의 개념으로 인식되어가며 목욕을 하는 빈도 또한 늘었다고 해요. 


국민민속박물관에 따르면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있어요. 더 해석해 보면, 고려시대에는 남녀가 옷을 벗고 하는 전신욕의 형태로 함께 목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듯해요.  


또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역대 고려왕들이 온천 행차를 즐기며 정사에 지친 피로를 풀고 때로는 질병을 치유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고려 왕실에서부터 온천문화가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게 해 줘요.

[출처 : 문화유산 채널]


옷 입고 목욕하는 유교의 끝판왕, 조선시대


다소 개방적이고 핫했던 고려의 목욕 문화는 엄격한 유교 국인 조선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돼요. 조선에서는 '알몸 전신욕'을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겼고, 남녀유별 사상에 따라 남녀가 같이 목욕하는 것을 금하였어요. 때문에 집에서 옷을 입고 목욕을 하는 ‘부분 목욕’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고 해요. 즉, 대야와 함지박을 이용한 부분 목욕식이며, 왕실에서조차도 세수간 나인이 왕이 사용할 목욕물을 별도로 준비해 올렸다고 해요. 조선시대에는 목욕을 얼굴 씻기, 손 씻기, 발 씻기, 머리 감기, 이 닦기, 뒤처리용 씻기 등으로 따로 진행하였던 것이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목욕 도구는 함지박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전신욕을 할 수 있는 날은 따로 정해져 있는데요. 그 시기는 음력 3월 3일(삼짇날), 5월 5일(단오), 6월 15일(유두), 7월 7일(칠석), 7월 15일(백중)로, 일 년에 딱 5번만 알몸으로 씻을 수 있었다고 해요.


보수의 끝판왕 조선이지만 목욕에 아주 진심인만큼 목욕 종류가 다양해졌다고 해요. 현대의 찜질방과 대중목욕탕에 가면 마련된 이벤트탕이 그 예예요.


조선의 이벤트탕, 향초탕

동의보감에는 ‘몸에 향이 나게 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목욕물에 향초를 넣는 방법이 쓰여 있어요. 모향의 잎을 다진 물을 넣은 물에 목욕을 하면 나쁜 냄새가 없어지고, 몸에 향기가 난다고 해요. 이밖에도 건강을 위한 인삼탕, 마늘탕도 있어요. 그러나 이런 목욕은 대중목욕탕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양반 일부의 전유물에 불과했어요.


조선의 찜질방, 한증소

찜질방에 있는 사방이 벽돌로 막히고, 뜨거운 ‘한증막’을 기억하시나요? 한증막의 '한증'은 높은 열을 보장하고, 그 속에 일정한 시간 들어가 있으면서 몸에 땀을 내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에요. 한증을 이용한 시설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세종 때에요.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따르면 관의 보호와 감독을 받는 ‘한증소’라는 시설이 존재했으며, 질병의 구료에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KBS <왕의 얼굴> 속 한증막 [출처 : 오펀 디스커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선조들의 목욕 이야기를 들으면서 확신하게 된 것은 우리가 목욕의 민족이라는 사실이에요. 목욕의 민족 후예답게 오늘도 뜻깊고 즐거운 목욕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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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목욕에 진심인 민족! 우리 선조들의 신기한 목욕 이야기
작성자 KEFII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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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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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은 행위를 넘어 그 당시의 정치, 경제, 가치관, 제도 등이 고스란히 녹여진 중요한 문화에요.


현대에서 목욕은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푹 담그며 피로를 푸는 정서적 역할'과 '간단한 놀이를 할 수 있는 유희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1000년 전 선조들에게 목욕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목욕에 진심인 케피가 놀랍고도 신비한 선조들의 목욕문화를 생생히 알려드릴 테니 이야기 속으로 퐁당 빠져보세요!




종교적 색채가 강한 목욕, 삼국시대


목욕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기록이 남은 시기는 신라와 삼국시대 때에요. 이 나라들은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던 불교국인만큼 물을 신성시했어요. 불교에서 목욕을 단순히 몸을 청결히 하기 위해 씻는 행위가 아닌, 제사와 같은 신성한 의식을 행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갈히 가다듬는다는 뜻으로, 주술적 ․ 종교적 의미가 가미됐어요. 즉, '몸을 씻는다 = 마음을 씻는다'는 거죠.


문화재청에서 밝힌 물에 얽힌 탄생설화를 살펴보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담장이덩굴로 덮인 우물가에서 탄생하여 동천에서 목욕한 후 광채를 발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물을 신성시하는 관념에서 샘이 있는 집은 샘굿을 하였으며, 의례행사로만이 아닌 샘물에 대한 토속신앙으로 자리 잡아 평상시에도 행해졌어요.


또, 그 당시 목욕은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죄수에게 '목욕벌'이란 이름을 내릴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어요. 삼국시대에 대중화된 풍속으로 자리 잡은 목욕문화는 백제왕이 불상, 경전을 일본에 보내면서 함께 전파되었으며 불교가 발전한 통일신라시대에 증기욕이 발달되면서 더욱 확대되어 일본에 전파되기도 했어요.

신윤복 '단오풍정' [출처 : 위키백과]



남녀노소가 함께하는 치료의 목욕, 고려 


삼국시대의 목욕이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에 반해 고려시대부터는 점차 목욕이 질병치료와 예방의학의 개념으로 인식되어가며 목욕을 하는 빈도 또한 늘었다고 해요. 


국민민속박물관에 따르면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있어요. 더 해석해 보면, 고려시대에는 남녀가 옷을 벗고 하는 전신욕의 형태로 함께 목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듯해요.  


또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역대 고려왕들이 온천 행차를 즐기며 정사에 지친 피로를 풀고 때로는 질병을 치유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고려 왕실에서부터 온천문화가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게 해 줘요.

[출처 : 문화유산 채널]


옷 입고 목욕하는 유교의 끝판왕, 조선시대


다소 개방적이고 핫했던 고려의 목욕 문화는 엄격한 유교 국인 조선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돼요. 조선에서는 '알몸 전신욕'을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겼고, 남녀유별 사상에 따라 남녀가 같이 목욕하는 것을 금하였어요. 때문에 집에서 옷을 입고 목욕을 하는 ‘부분 목욕’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고 해요. 즉, 대야와 함지박을 이용한 부분 목욕식이며, 왕실에서조차도 세수간 나인이 왕이 사용할 목욕물을 별도로 준비해 올렸다고 해요. 조선시대에는 목욕을 얼굴 씻기, 손 씻기, 발 씻기, 머리 감기, 이 닦기, 뒤처리용 씻기 등으로 따로 진행하였던 것이죠.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목욕 도구는 함지박이라고 봐도 무방하죠.


전신욕을 할 수 있는 날은 따로 정해져 있는데요. 그 시기는 음력 3월 3일(삼짇날), 5월 5일(단오), 6월 15일(유두), 7월 7일(칠석), 7월 15일(백중)로, 일 년에 딱 5번만 알몸으로 씻을 수 있었다고 해요.


보수의 끝판왕 조선이지만 목욕에 아주 진심인만큼 목욕 종류가 다양해졌다고 해요. 현대의 찜질방과 대중목욕탕에 가면 마련된 이벤트탕이 그 예예요.


조선의 이벤트탕, 향초탕

동의보감에는 ‘몸에 향이 나게 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목욕물에 향초를 넣는 방법이 쓰여 있어요. 모향의 잎을 다진 물을 넣은 물에 목욕을 하면 나쁜 냄새가 없어지고, 몸에 향기가 난다고 해요. 이밖에도 건강을 위한 인삼탕, 마늘탕도 있어요. 그러나 이런 목욕은 대중목욕탕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양반 일부의 전유물에 불과했어요.


조선의 찜질방, 한증소

찜질방에 있는 사방이 벽돌로 막히고, 뜨거운 ‘한증막’을 기억하시나요? 한증막의 '한증'은 높은 열을 보장하고, 그 속에 일정한 시간 들어가 있으면서 몸에 땀을 내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에요. 한증을 이용한 시설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세종 때에요.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에 따르면 관의 보호와 감독을 받는 ‘한증소’라는 시설이 존재했으며, 질병의 구료에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KBS <왕의 얼굴> 속 한증막 [출처 : 오펀 디스커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선조들의 목욕 이야기를 들으면서 확신하게 된 것은 우리가 목욕의 민족이라는 사실이에요. 목욕의 민족 후예답게 오늘도 뜻깊고 즐거운 목욕 시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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